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산 전투 (문단 편집) == 전투 경과 == 7월 5일 새벽 3시 오산 북방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대대는 일대에 B, C 중대에게 [[진지공사]]를 시킨 뒤 75미리 무반동총 4정, 4.2인치 박격포 4문도 배치했고, 이를 미 52포병대대가 지원하기로 했다. 이 무렵 이들은 북한군이 자신들을 보면 '미군이 참전했다' 며 물러설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전 7시경 쏟아지는 비 속에서 이들은 수원 부근에서 북한군을 목격했고, 이후 8시경 북한군 4사단 보병들과 107전차연대 전차([[T-34-76|T-34]])들이 이들이 있는 곳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에 관측장교가 포격 요청을 해 오전 8시 16~18분 경 포탄 두발이 선두 전차를 향해 떨어졌다. 하지만 전차들은 이에 개의치 않았고, 이에 스미스 중령은 적 전차가 700 야드 내에 들어오자 무반동총과 로켓포를 집중적으로 쏘아댔고, 미군 포병들도 직사포격해 이를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선두 전차 2대가 멈추었고, 이 중 한대에서 튀어나온 승무원들이 미군과 교전했는데, 이들 중 한명이 미군 기관총 부사수를 쏴죽였다.[* 이는 한국전쟁 최초의 미군 전사자다.] 하지만 후속 전차들은 이들을 무시하고 남진했으며, 이렇게 총 33대의 전차가 미군 방어선 밑으로 내려갔다. 이 와중에 진지 내의 미군들은 여전히 "아마 저 친구들이 우리들을 못봤기에 지나갔지, 미군이 왔다는 걸 알면 되돌아 갈 것이다." 는 희망 속에서 후방의 포병에게 적 탱크가 우리 진지를 지나갔다고 알려 주었다.[* 하지만 이 희망도 후속 전투에서 북한군들이 미군임을 알고도 쏴재낌으로서 깨어진다.] 하지만 포병들도 이 전차들을 감당할 수 없었고, 이 중 한대의 궤도를 파괴해 멈춰세우긴 했으나, 안에서 튀어나온 승무원들에 의해 밀러 O. 페리 미 52포병대대장이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오전 11시경 북한 4사단의 주력이 전차 3대와 함께 죽미령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이에 미군들은 박격포와 기관총을 선두 트럭에 집중해 트럭 안의 보병들을 살상시켰다. 그러나 뒤따라오던 전차 3대가 가세해 3시간 가량 교전한다. 하지만 후방의 포병대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고,[* 사실 이는 앞서 지나가던 선두 전차들이 전화선을 뭉개고 가는 바람에 끊어진 것이다.] 탄약까지 고갈되자 스미스 대대장은 오후 2시 30분 경 C중대부터 황급히 철수시켰으나, 워낙 다급하게 진행된 탓에 B중대는 철수 명령을 듣지 못했으며, 전장에 남겨진 낙오자와 부상병들은 그대로 북한군들에게 전사했다. 한편 스미스 중령은 포병대대장과 합류, 패주병들을 수습했으나, 남쪽 오산 시내가 점령당한 걸 알고 안성을 거쳐 7월 6일 천안까지 내려갔으며, 이 과정에서 보병 540명 중 150여 명, 포병 31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북한군 역시 약 5,000명 중 15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그리고 미군의 참전으로 북한군이 진격을 멈추리란 맥아더와 딘 미 24사단장의 기대 또한 이 전투로 깨어지게 되었다. 또한 남쪽의 미 34연대와 상급부대인 미 24사단은 이들로부터 연락이 두절되자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그 다음날 6일 잔존병들에게 전해듣고서야 상황을 알게 되었으며, 곧바로 [[평택-안성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